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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 가다(현대불교. 1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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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꿈을이루는사람들 댓글 0건 조회 1,291회 작성일 18-08-3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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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에 가다

노덕현 기자  |  noduc@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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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6.05  18: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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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를 벗어 손에 쥐었다가, 눈을 하늘에 두었다가, 땅을 내려다 보고 마침내 좌우를 살피며 몇 분쯤 병원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이런 나를 쳐다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나는 얼굴을 한 번 쓸고는 큰 걸음으로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구미의 한 산부인과 안으로 들어서자 한 손은 부른 배에 얹고 한 손은 허리에 댄 산모들이 눈에 들어왔다. 음, 음, 당장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라 헛기침이 나왔다. TV 다큐에서나 보았던 산부인과 모습이다. 마침 한 남자가 만삭의 아내를 부축하며 접수계로 다가서다 나와 딱, 눈이 마주쳤다. 눈빛에서 스님이 무슨 일로 산부인과에? 하는 의구심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대둔사 주지 진오라고 합니다. 원장 선생님을 뵐 수 있을까요?”
진료실 앞에서 차례를 지키며 의사 선생님을 기다렸다. 태아 사진이 들어있는 진료카드를 들여다보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앞 순번의 임산부들이 흘끔흘끔 승복을 쳐다보았다. “왠 스님이 산부인과? 혹시 사고친거 아니야” 라는 소리가 들릴까 신경쓰여서 민망한 순간이었다.
발걸음을 떼는 일이 쉽지 않았던 만큼 나는 꼭 이곳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갈 곳 없는 이주 노동자들이 쉼터에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여성 노동자들도 쉼터로 들어오는 사례가 생겼다. 그런데 이 여성들 대부분이 홀몸이 아니었다. 남자 친구를 만나고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임신이 되면 일할 곳에서 눈치를 받아 마땅히 갈 곳도 없는 딱한 처지가 되었다.
“나 돈 없어요. 애기 낳으려면 이백오십만 원 달라고 했어요. 나 집도 없어요.”
아직 한국어가 서툴러 말이 서툰 인도네시아 여성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처음에는 임신중독으로 온몸이 탱탱 부은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 눈앞이 캄캄했다.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한다는 생각에 누구에게 전화를 걸지 고민을 했다. 나와 다른 또 하나의 생명을 몸에 품은 여성들은 남성 노동자들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그때 아이를 낳는데 그렇게나 큰돈이 든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순산의 경우가 그렇고 수술을 하면 비용이 더 든다는 정보도 산부인과 상담을 받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나와 전혀 무관했던 세상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처음 한두 번은 어떻게 출산비용을 만들까 고민하다가 이건 결코 한 번에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도움을 청하는 만삭의 이주여성을 생각해 결국 출산비용을 할인 받기 위해 용기를 내서 병원을 찾았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전후 사정을 전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다행이 병원과 그곳 의사 선생님 모두 지역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지속적인 도움을 약속해주셨다.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병원 문을 나설 수 있었다. 물론 비용을 적게 들인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된 건 아니었다.
나는 여성의 배앓이가 얼마나 많은 원인으로 기인하는지 이들을 만나기 전에는 상상하지 못 했었다. 연애도 모르고, 결혼도 안 해 본 학승이 속세에서 만난 인연들을 챙기려니 알아야 할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리는 한동안 임신과 출산 책으로 공부를 했다. 보통 남성의 배앓이 원인이 서너 가지라면 여성은 서른 가지가 넘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많은 산모들이 병원에서 아이를 순산했지만 일부는 사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임금체불과 생필품 지원으로 시작했던 구미 마하이주민센터는 노동자 상담실 운영에서 쉼터 기능으로 확장되어 오갈 데 없는 외국인들에게 24시간 숙식을 제공하고 여성 노동자의 출산을 돕는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가 그 일을 담당하자고 권유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었다.
적막하던 센터에도 아이 울음소리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여성과 아이를 배려하는 분위기로 흘렀다. 여성 노동자를 위해 비구니 스님이 필요했다. 마침 복지활동을 해 보고 싶다는 스님을 만나게 되고 어느덧 외국인 스님과 사회복지사 그리고 통역 담당 이주여성을 합쳐 8명의 일꾼이 센터에서 이주 노동자들의 애환을 돌봐 주고 있다.
오랜만에 빠른 걸음으로 산부인과 병원에 들어섰다. 일순간 놀란 산모와 가족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집중이 되었다. 매번 올 때마다 왠지 잘못 찾아 온 곳 같이 부끄러워지는 공간이다. 오늘은 중국 노동자 부부가 출산한 아이를 보러 온 걸음이었다. 오랜 산고로 지쳤을 텐데 들어서는 우리를 발견한 산모가 수줍게 웃으며 강보에 쌓인 아기를 보여줬다. 여자 아이였다.
“아이고, 귀여워라! 꽁시니~! 꽁시니~! ”
당신 축하해요를 중국말로 전했더니 아기 엄마가 잇몸을 드러내며 행복해 한다. 축하를 받는 침대 옆에 서있는 아기 아빠에게 미역과 아기 옷을 선물했다. 행복은 가족이 구성되면서 시작되는 것을 느꼈다.
원장 선생님을 만나 병원비를 할인 받았으니 앞으로 무슨 일을 못할까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아기의 웃음은 어쩌면 이렇게 평화로울까? 세상의 모든 아빠들이 아이의 잠자는 모습을 보고 세상 근심 걱정을 모두 잊게 된다는 말이 이해되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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