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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스님(현대불교. 201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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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꿈을이루는사람들 댓글 0건 조회 1,425회 작성일 18-08-3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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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가슴 벅찬 말 ‘아빠스님’

노덕현 기자  |  noduc@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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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5.30  20: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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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명에게서 듣는 ‘아빠’라는 그 가슴 벅찬 말. 이 귀중한 말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속의 아빠들이 힘을 내어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좋은 아빠가 되는 일이 참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 그런 아빠들에게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대둔사에도 봄이 찾아왔다. 봄은 숨찬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햇살을 만끽하기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이 나른한 평화를 누리는 것도 잠깐 일어나라, 일어나기 싫다. 학교 가자, 학교 가기 싫다 하는 입씨름 소리가 내 귓가로 들려왔다.
“이눔 자식들, 어여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 안 해!”
한마디를 툭 던지자 부스스 까치 같은 머리 꼴을 하고 마지못해 일어나는 세 명의 남자 아이들, 아침부터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남자 아이들 셋이 모여 있다 보니 두 곱절의 힘이 들었다. 특히 말썽꾸러기 두 녀석은 내 속을 무던히도 섞였다.
나는 한동안 진호, 진수, 오복이 이렇게 세 아이의 보호자인 ‘아빠 스님’으로 통했다. 진호와 진수는 형제지간인데 두 녀석은 무던히도 내 속을 섞였다. 미운 일곱 살이라고 하던데 이 녀석들은 그보다 더 힘든 미운 사춘기를 나고 있었다.
“진수 아버지 되십니까?” 하루는 차분한 목소리로 한 남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기는 진수가 다니는 학교입니다. 아버지께서 한 번 다녀가셔서 학부형 상담을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침부터 걸려 온 전화에 마음이 복잡했다. 처음으로 학부모 입장이 되어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께 불려가는 날이었다. 나를 마주한 교장 선생님은 난감한 표정으로 어렵게 말을 꺼내었다.
“스님, 애들을 다른 학교로 전학을 시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진수 녀석이 제법 큰 잘못을 저질렀다. 컴퓨터실에서 게임을 하는데 선생님이 못하게 한다고 가위로 컴퓨터 10대의 자판 선을 다 잘라 버린 것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교장 선생님 한 번만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간신히 여기에 적응을 하고 있는데 또 옮겨 가면 똑같은 일이 반복 됩니다.”
이 말을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 바지 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져야 했다.
“가정 폭력으로 상처가 많은 아이예요. 엄마 혼자 키우기 어려워 제게 데리고 온 아이인데 앞으로 좀 더 관심을 가지겠습니다.”
그날 밤 진수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두 귀를 막아 버린 것처럼 대꾸도 없고 반응도 없었다. 나중에서야 진수가 엄마와 떨어져 분리불안 장애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빠가 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다. 어쩌면 좋은 아빠가 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처음 절에 아이들을 받아들이면서 내가 잘하면 아이들도 잘 따라 주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 기준에서 잘하는 것과 아이들 기준에서 잘 하는 것은 달랐다. 이 차이를 인정하기까지 적지 않은 속앓이의 시간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꾸 잔소리가 늘었다.
‘잘했다, 이것 좀 도와주면 안 되겠니?’ 이런 훈훈한 말이 오고 가야하는데 자꾸 잔소리가 늘어나니 답답한 심정이 되었다. 부모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구나, 부모에게도 자격이 필요하구나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세속에 사는 사람들이 보살이구나를 알게 되었다. 지금은 여성들에게 붙이는 보통 명사가 되었지만 그 원 뜻은 관세음보살의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자녀를 키우고 사는 일이 그 보살이 되기 위한 첫 번째 과정 인忍이다. 참을 인忍자를 가지지 않으면 보살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들이 남편에게, 자식에게 이런 보살 같은 마음으로 살아간다. 절에서 몇 차례 아이들을 맡아 키운 이후 나는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을 받지 않는다. 아이들에게는 ‘스님 아빠’ 보다 엄마의 따뜻한 보살핌이 더 필요하다. 한 부모 가정이라도 엄마의 품이 아이들에게는 더 좋은 것이다.
이 작은 실패를 통해 나는 아빠 되기의 어려움 그리고 처음으로 아이에게 ‘아빠 스님’이라고 불렸을 때의 환희를 알게 되었다. 한 생명에게서 듣는 아.빠.라는 그 크고 가슴 벅찬 말. 이 아름다운 말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속의 아빠들이 힘을 내어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좋은 아빠가 되는 일이 참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 그런 아빠들에게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내 곁을 떠나간 녀석들아, 언제가 스님에게 연락 한 번 다오.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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